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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회.

이틀 동안 종석은 서고에 있는 서책들을 살폈다. 서가에는 사서삼경에서부터 여러 서책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손상이 심한 서책들도 있었다. 특히 서가의 바닥에 있던 책들은 거의 죽이 되다시피 해서 만지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하긴 이 서책들이 이 바닥에 깔려 있던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봐야 할 것이다.

서책들 중에는 종석이 보기에도 명필이라 부를 만한 서책들도 몇 권 있었다.

어쨌든 그런 서책들을 종석은 빠르게 살피며 유진의 필체가 있는 서책들을 찾았다.

서책 한 권을 내려놓고 다시 새로운 서책을 들어 올렸던 종석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다.”

명진록의 필체가 바로 유진 학사의 것이었다.

그에 종석이 급히 서책을 펼쳤다.

명이 망하였다.

명을 모시는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명이 망한 것은 하늘의 순리였다.

수많은 황제들의 무능과 탐욕이 명을 썩게 만들었으니 어찌 명이 망하지 않을 것인가.

다만··· 내 대에 이르러 명이 망한 것은 내 무능이 일조를 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플 뿐이다.

······.

명진록에는 유진이 낙방촌으로 돌아온 이유와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만약’을 기록하고 있었다.

만약 명의 황제가 이런 정책을 추구했다면, 만약 이런 일에 이런 대응을 했다면 하는··· 명이 나아갔어야 하는 길을 적어 놓은 것이 바로 명진록이었다.

명진록을 읽은 종석이 그 밑에 있는 서책들을 바라보았다. 제목이 있는 것도 있었고, 없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제목이 있는 것들은 모두 유진의 필체였다.

그에 종석이 빠르게 서책들을 흩어보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이 있는지 일단 대충이라도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서책들을 빠르게 살피던 종석의 손이 멈췄다.

“불어?”

서책에 적혀 있는 글은 불어였다.

불어로 적힌 글을 본 종석이 그것을 가만히 들고는 이불이 있는 곳에 가서 앉았다.

‘내가 찾던 것이 이거다.’

불어로 적힌 서책을 본 순간 종석은 이것이 자신이 찾던 것임을 알았다.

그에 종석이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

종석은 유진이 남긴 서책을 지긋이 보고 있었다.

유진은 경험치북을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유진이 경험치북을 얻은 경로는 바로 왜구들과의 싸움이었다. 남해를 침탈한 대규모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그 수장을 쓰러뜨리고 찾은 것이 바로 경험치북이었다.

유진이 경험치북을 챙긴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수장의 가슴에 장력을 뿜어냈을 때 갑옷과 옷은 산산이 터져나갔는데, 가슴에 있던 경험치북은 멀쩡했던 것이다.

게다가 경험치북이 날아가자 왜구가 경악을 하며 그 책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에 반사적으로 책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책을 본 유진은 종석과 같은 의문을 가졌었다. 왜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에 유진은 글을 적었고 필기자로 설정이 되었다.

그때 유진의 나이는 오십이 넘어 이미 학문과 무공이 일가를 이룬 상태··· 그래서 경험치북을 이용해 많은 경험들을 얻지는 않았다.

유진은 노력 없이 얻는 경험이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경험치북을 이용해 경험을 얻은 것도 호기심과 의문을 풀 방도로 얻었을 뿐이었다.

잠시 서책을 보던 종석이 경험치북을 꺼내 바라보았다.

유진이 남긴 기록은··· 유진이 어떻게 경험치북을 얻었는지에 대해 알려주기는 하지만 경험치북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보가 되지 않았다.

다 종석이 아는 내용이니 말이다.

“너에 대해 알기가 이리 어렵니?”

경험치북은 전 필기자가 남긴 경험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안 보여주는 것도 존재한다.

바로 전 필기자의 이름, 그리고 전 필기자가 경험치북을 얻게 된 과정이었다.

경험치북에 대해 알아가면서 종석은 전 필기자들이 경험치북을 얻은 경험에 대해 요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험치북은 주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처음 경험치북을 얻었을 때의 경험을 다시 보여 달라는 글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라는 글과 함께 말이다.

아마도 유진도 이에 대한 내용을 알아서 경험치북이 아닌 일반 서책에 글을 적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하던 종석이 서책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최소한 유진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작게 중얼거리던 종석이 문득 턱을 쓰다듬었다.

‘유진의 삶···.’

유진의 삶을 생각하던 종석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유진의 삶을 생각을 하자 뭔가 경험치북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가 생각이 난 것이다.

종석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밖에서 급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원님! 의원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종석이 급히 경험치북을 배낭에 집어넣고는 밖으로 나왔다.

“네!”

밖에는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피?”

노인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산에서 멧돼지가 나타나서 사람을 상하게 했습니다.”

“멧돼지? 환자는요?”

종석의 말에 노인이 서둘러 그를 데리고 뛰어갔다. 그런 노인의 뒤를 따라 뛰어간 종석은 마을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간 종석은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과 그를 안고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마을에 처음 왔을 때 허리가 아프다고 했던 할머니였다.

“아이고! 의원님! 의원님 내 새끼 좀 살려줘요!”

할머니의 외침에 종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환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갓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아직 어린아이였다. 환자의 맥을 살피던 종석이 급히 말했다.

“혹시 마을에 침 없습니까?”

“침?”

“어디 침 있는 집 없어?”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젓자 할머니가 종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원이 침통도 안 가지고 다녀요?”

“그게 한국에서 와서···.”

할머니를 잠시 보던 종석이 일단 깨끗한 물과 천을 가져오게 시키고는 아이의 옷을 벗겼다.

‘배를 강하게 박은 모양이다. 어혈이 많이 쌓였어, 게다가 갈비뼈도 나갔다. 시간도 많이 지체됐어.’

맥을 보니 지금 막 다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사고가 난 지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은 지났다.

그에 종석이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종석의 말에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모두 물러나세요!”

“물러나라잖아! 어여 물러나! 어여!”

할머니의 고성에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자 종석이 몸을 일으켰다.

“후우!”

“의원님 어서 치료를···.”

“잠시만요.”

할머니의 재촉에 종석이 양손을 펼쳤다.

‘지금 내 내공으로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건곤구공풍으로 바람의 힘을 빌린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가장 빠르게 바람의 힘을 끌어들여야 했다.

그에 종석이 양손을 벌리고는 바람을 느끼려 했다. 경험치북이 보여 줬던 유진의 건곤구공을 떠올리면서···.

‘바람··· 바람···.’

종석이 바람을 간절히 원할 때 그의 손바닥으로 바람 한 줄기가 스치며 지나갔다.

휘이익!

부드럽게 손바닥에 닿는 바람을 느낀 종석의 손이 움직였다. 손이 움직이고 어깨가 움직이고 허리가 움직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이 움직이는 것과 함께 바람이 종석의 손바닥에 머물며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공이 종석의 손바닥에서 회전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휘리릭! 휘리릭!

한 줄기에 불과했던 바람은 종석의 움직임에 따라 강해지고 커졌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제 손바닥뿐만 아니라 종석의 전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건곤구공풍···.’

건곤구공풍을 펼침에 따라 전신에 힘이 스며 들어오는 것을 느낀 종석이 그 기운들을 단전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온몸으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툭! 투투툭! 툭!

그와 함께 종석의 몸에서 콩 볶는 소리가 연신 들려오기 시작했다.

종석의 내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바람의 기운이 종석의 몸을 자극하며 막혀 있는 기혈들을 타통하고 있었다.

기혈들이 타통됨과 함께 종석의 얼굴에 오르가즘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기혈이 하나 뚫릴 때마다 막힌 하수구가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마치··· 혼자 있을 때 무언가를 할 때의 그런 쾌감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런 쾌감만을 느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눈앞의 환자는 피를 흘리고 있고 상태는 나빠지고 있으니 말이다.

몸의 기운을 잔뜩 끌어올린 상태에서 몸을 멈춘 종석이 급히 환자에게 다가갔다.

털썩!

환자에게 다가갈 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괜찮으세요?”

종석의 말에 할머니가 멍하니 그를 보다가 물었다.

“신선님이세요?”

뜬금없는 말에 종석이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환자의 머리카락을 잡고는 몇 가닥 뜯었다.

손가락 사이로 딸려오는 머리카락들을 잡은 종석은 노인이 가져온 따뜻한 물에 그것들을 담가 흔들고는 천에다 놓고는 눌렀다.

그렇게 물기를 뺀 종석이 머리카락을 잡고는 내력을 집중했다.

스륵!

그러자 종석의 손가락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일어났다.

머리카락처럼 얇은 침을 내력으로 만들어낸 종석이 숨을 고르고는 빠르게 환자의 몸에 시침을 하기 시작했다.

스륵! 스륵! 스륵!

종석의 손가락에 잡힌 머리카락들이 환자의 몸에 하나둘씩 박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침을 한 종석이 마지막으로 환자의 인중에 침을 놓았다.

“끄으응!”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는 아이를 보며 종석이 말했다.

“정신이 드니?”

“의··· 의원님?”

“그래. 멧돼지한테 다쳤다면서?”

“그게··· 산에 나물 캐러 갔는데 갑자기···.”

“그렇구나. 어디 불편한 곳 좀 이야기해 줄래?”

“숨을 쉬기가 좀 불편해요.”

“그래.”

아이의 말에 종석이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살며시 대고는 가볍게 원을 그렸다.

“이제 목으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올 건데 참지 말고 그대로 토하면 돼. 할 수 있겠지?”

“네.”

아이의 답에 종석이 살며시 그의 상체를 잡아 일으켜서는 손바닥에 내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우엑! 우엑!”

아이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으악!”

“피다.”

“어떻게 해.”

사람들의 외침에 종석이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는 말했다.

“잘했어. 어때? 이제 숨을 쉬기 좀 편하지?”

“하아! 네.”

“그래, 이제 거의 다 됐어.”

그리고는 종석이 아이의 상체를 다시 눕혔다. 갈비뼈 몇 대가 나갔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아이를 눕힌 종석이 아이의 허리 쪽을 바라보았다. 허리 쪽에는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멧돼지 어금니 자국이다.’

구멍을 잠시 보던 종석이 다시 진맥을 해 보았다. 배 쪽에 어혈과 기가 몇 곳 막힌 곳이 느껴졌지만 장기가 크게 상한 곳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히 어금니가 장기까지는 안 들어갔네.’

속으로 중얼거린 종석이 노인에게 약초 몇 개를 말해 가지고 오게 했다.

노인이 약초를 가지고 오자 종석이 그것을 물에 넣었다가 빼고는 손바닥 사이에 넣고는 으깨기 시작했다.

스스슥! 스슥!

종석의 손바닥 사이에서 손가락 마디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약초들이 으깨지며 죽이 되기 시작했다.

마치 입에다 넣고 씹은 것처럼 된 죽을 손바닥에서 긁은 종석이 그것을 환자의 상처에 대고는 천으로 묶었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리라 한 종석이 마을 옆 숲으로 들어가 조금 두꺼운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려서는 돌아왔다.

“칼 있으세요?”

종석의 말에 한 사람이 급히 집으로 뛰어가서는 식칼을 들고 왔다.

식칼을 받아 나뭇가지들을 다듬은 종석이 아이의 상체에 대고는 천으로 그것을 단단히 고정을 했다.

“휴!”

상체를 모두 묶은 종석이 아직도 단단하게 일어서 있는 머리카락 침들을 하나둘씩 뽑아냈다.

그리고 숨을 고르자 할머니가 급히 물었다.

“신선님, 우리 손주 어때요?”

“며칠 상세를 봐야겠지만 위중한 것은 다 치료했습니다.”

“그럼 살은 건가요?”

“그럼요.”

종석의 말에 할머니가 절을 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선님 감사합니다.”

할머니의 말에 종석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리고는 가져온 널빤지에 아이를 조심히 눕힌 사람들이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집으로 옮겨지는 것을 볼 때 마을 어른들이 종석을 향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선님.”

그 모습에 종석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의원이 아니라 신선? 왜 나를 신선이라 부르지?’